디자인: 긴 글

디자이너를 위한 Ted 강연 걸작선

먹바 mugba 2022. 6. 9.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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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겸 Ted를 듣고 있다. 명성으로만 알고 있다가 처음 들었을 때 그 내용의 깊이에 감동받은 후로 한국어 자막이 새로 추가되는 강연은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 주로 디자인 분야 강연을 위주로 보고 있다. 과학, 환경 같은 분야에 비하면 서치에 걸리는 수가 적지만 모두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주는 양질의 강연이다. 영어 공부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시각을 넓히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기분으로 기쁘게 시청하고 있다.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봤을 때 흥미로웠던 Ted 강연 5개를 소개한다. 모두 너무 좋은 내용이고 디자인에만 국한된 주제들은 아니라서 감상이 천차만별일 것으로 예상한다. 모두 10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짧으니, 내가 달아둔 부연 설명을 무시하고 바로 강연 영상을 시청하는 걸 추천한다!

 

왜 더 많은 데이터가 더 나은 결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빅데이터가 간과하는 사람의 통찰
연사: Tricia Wang

 

The human insights missing from big data

Why do so many companies make bad decisions, even with access to unprecedented amounts of data? With stories from Nokia to Netflix to the oracles of ancient Greece, Tricia Wang demystifies big data and identifies its pitfalls, suggesting that we focus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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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하기 전 해야할 게 있다. 우리는 기획 단계에서 자료 조사를 먼저 한다. 이 단계에서는 주장한 가설('사이즈가 더 큰 배너의 클릭률이 좋을 거야')에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설문조사, 통계 자료 등이 사용된다. 요즘은 정부 기관이나 각종 사이트에서 무료로 흘러 다니는 막대한 양의 자료를 접할 수 있다. 오히려 고르는 게 일이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료량이 많다고 무조건 옳았던 경험을 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가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충분했는데. 뭔갈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Tricia Wang은 노키아에서 근무했을때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당시 노키아는 잘 나가고 있었다. Tricia Wang은 연구원으로서 중국 시장의 정성적 경제 지표를 파악하고 있었다. 직접 노점상인이 되어보거나 피시방에서 하루 종일 현지 사람들과 지내면서 말이다. 몇 년간 축적된 질적 데이터는 놀라운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스마트폰 시장이 전세 역전할 판도를 읽어낸 거다. 당시 스마트폰 사업은 신생 분야였다. 모두가 스마트폰은 한철일 거라 떠들던 시기였다. 노키아는 Tricia Wang의 그 놀라운 인사이트를 무시했다. 표본 집단이 너무 적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에 연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노키아)의 설문조사와 방법은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시키기 위해 디자인되어 있어요. 그리고 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새로운 인간 역학을 보고 왔고요. 시장을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시장 밖을 내다봐야 합니다.

누구든 내 주장에 자료를 끼워 맞춰 본 경험이 있을 거다. 노키아의 경우에는 비즈니스 모델이었고 결국 망했다.

결국 사람의 핵심 니즈는 사람과 직접 부딪혀봐야 알 수 있다. 데이터 밖으로도 눈을 돌려 인간이 할 수 있는 ‘통찰력’을 발휘해야 함을 중간중간 상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강연에 깊게 감명받고 UX 디자이너라면 여러 인간상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지론이 생겼다. 그래서 한때 주말마다 일일 아르바이트를 해봤던 재밌는 사연도 있다. 행동으로 이어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 강연이 제일 인상에 남는다.

*Ted 강연 인용글은 글 맥락에 맞게 다듬었다.

 

David Korins 디자이너의 아름다운 작품 세계

브로드웨이 세트 디자이너가 말하는 감동적인 공간을 만드는 3가지 방법
연사: David Korins

 

3 ways to create a space that moves you, from a Broadway set designer

You don't have to work on Broadway to design a set, says creative director David Korins -- you can be the set designer of any space in your life. Sharing insights from his work on hits like "Hamilton" and "Dear Evan Hansen," Korins offers a three-step pr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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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도입부부터 무대 디자이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압도된다. David Korins의 여유 있는 태도와 힘을 살짝 뺀 화술이 합쳐져 스탠딩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유쾌하다, 재미있다. 프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로, 이런 강연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게 좋다.

전체적으로 '공간 디자인이란 무엇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듯하다. 연사만의 디자인 철학을 주장하는 식이다. 명확하게 꽂혀서 생각하게 하는 주제는 개인적으로 없었지만, 디자인된 작품이 너무 아름다워 연설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야기마다 연사가 디자인한 세트 작업을 예시로 들며 강연 중간중간 이미지 자료로 보여준다. 영상을 직접 보는 걸 추천한다.

 

스스로를 한계에 가두는 사람들

왜 사람들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믿을까
연사: Graham Shaw

 

Why people believe they can't draw

Most people think they can't draw, but communications expert Graham Shaw isn't buying it. In this fun, instructional talk, he demonstrates how a few adjustments to your drawing technique (and your attitude) can leave you with an effective new pres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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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자막은 없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강연이다. 우리는 스스로 기준을 만든다. ‘나는 디자이너니까, 과학이나 수학 분야는 절대 못해.’처럼 어떤 박스 안에 나를 욱여넣는다.

강연 도입부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요청한다. 몇 명만이 손을 든다. Graham Shaw은 청중들에게 자기를 따라 그림을 그려 보라 한다. 앞에서 아주 간단한 캐릭터를 그리는 방법을 시연하고 청중들이 함께 따라 그리는 식이다. 이렇게 몇 가지 다른 도안의 캐릭터를 청중과 함께 그린다. 계속. 이 강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때 즈음, 영상 마지막을 이 말이 장식한다.

… 오늘 강연장에 들어오기 전까지 당신은 자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 사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깨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안될 거라 생각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정해두고 끊임없이 검열하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UXUI 디자인 트렌드였던 3D 에셋이 유행했던 것도 패러다임을 깬 예시로 보고 있다. 이런 시도가 이전에 유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말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 말고도 가능성을 제한하는 무수한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을까요?

*Ted 공식 한국어 번역이 없어, 인용한 강연 내용은 직접 번역했다.

 

디자이너 여러분, 불의에 맞설 준비가 되셨나요?

테라노스, 내부 고발 및 권력에 진실 말하기
연사: Erika Cheung

 

Theranos, whistleblowing and speaking truth to power

In 2014, Erika Cheung made a discovery that would ultimately help bring down her employer, Theranos, as well as its founder, Elizabeth Holmes, who claimed to have invented technology that would transform medicine. The decision to become a whistleblower 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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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같은 대기업이 사실은 거대한 악의 축이라면? 우리는 이 기업들에 맞서 진실을 알릴 용기가 있을까?

Erika Cheung는 대학교 졸업 후 테라노스라는 회사를 알게 된다. CEO 였던 엘리자베스 홈즈와 자신의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고 회사에 입사하는 걸 결심했다. 악명 높은 테라노스 사기극 사건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기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의에 맞서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강연에서도 말하듯 어려운 건 행동으로 직접 옮기는 부분이 아니다. 행동할지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부터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불의와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사용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UX가 대표적이다. 예시로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신청 시 기부 신청 버튼이 숨겨져 있어 실행 첫날 기부 취소 문의가 쇄도해 작은 화제였던 사건을 들 수 있다. Bad UX 뒤에는 탐욕스러운 손이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회사 밖 환경에 영향을 주는 불의도 있고 회사 안에서 조용히 행해지는 불의도 있다. 디자이너 앞으로 그래프 이미지 조작이나 서류 조작 같은 업무가 은밀하게 전달되는 건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사실이다. 우리는 '이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진 않겠지.'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깔끔하게 포토샵 한 이미지를 말없이 건넨다. 하지만 위로는 우리만의 생각일 뿐, 이 이미지가 어떻게 쓰일지 디자이너는 전혀 모른다.

그런 때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했었나? 분노했던가? 체념했던가? 이전에, 불의를 느끼고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은 크고 작은 불의들을 넘기며 체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하는데 무뎌져 있다. '이건 좀 아닌데?'하고 느낄 수 있는 비도덕을 감지하는 센서가 망가진 것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갈 때 더듬이가 뽑힌 듯 썩은 내를 감지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디자이너의 모습이다. 당장 모든 걸 엎어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윤리・도덕적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센서를 늘 긴장시켜두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행동할지 하지 않을지 결정하기 이전에, 불의인지 아닌지를 먼저 아는 것이 첫 순서이니까.

 

사회 문제는 디자인에 투영된다

디자인이 모든 사람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
연사: Sinéad Burke

 

Why design should include everyone

Sinéad Burke is acutely aware of details that are practically invisible to many of us. At 105 centimeters (or 3' 5") tall, the designed world -- from the height of a lock to the range of available shoe sizes -- often inhibits her ability to do things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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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éad Burke의 연설이 디자이너를 향한 것이라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시스템은 디자이너와 직결되어있지 않다. 기업, 체계, 즉 기획과 관련되어있다. 사회는 디자인이 주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자이너는 자본주의의 개 같은 존재다.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온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산업 혁명이 도래한 이래로 디자인은 분업화에서 자연스레 필요로 탄생한 분야다. 태어날 때부터 기업이 목줄을 쥐고 있는 형편이었다. 모든 계획과 결정은 기업의 이익 하에 승인되고 반대되는 의견은 버려진다. 디자인은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그런데 디자이너에게 사회적 책임을 문다면 황당할 따름이다. 디자이너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연사의 말은 디자이너한테 하는 말이 아닌 이 사회에 던졌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왜 소외되는 이들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회적 인식은 개인에게 영향이 가고, 개인은 기업에게 영향을 주고, 기업은 디자이너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렇게 나온 디자인은 사회상을 반영하게 된다. 공공 디자인 또한 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의 생활은 디자인에 영향을 주고, 디자인은 역으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 두 세력이 무한히 반복되는 형국이다. 이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을까?

현재 상황은 절망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에 누군가 배제될 상황을 인식해서 최대한 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단계까지 왔다. 사회의 흐름도 유니버설 하지 못한 기업에는 눈초리를 주는 분위기다. 이전에 화제 되었던 화장품과 컵라면 제품에 점자 표기를 각인한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목줄은 기업이 쥐고 있다. 이 흐름이 시들해지면 기업은 다시 누군가를 배제하는 디자인을 내놓을 것이다. 기업의 자유에 맡겨서는 안 된다. 법률이 있어야 한다. 디자인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관련 법의 필요성 또한 커질 테다. 물론 법률 기준을 세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디자인에 녹여낼 것인지는 논의가 많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그래도 낯선 풍경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언제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으니까. 잘 해낼 거라는 낙관주의로 글을 맺는다.

 

 

 

주석

*최범,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 안그라픽스, 2021, 142-146쪽, 151-152쪽

*김상규, 『디자인과 도덕』, 안그라픽스, 2018,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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